본문 바로가기

독서가의 서재

사피엔스 인상 깊은 문장 종합 정리

인류는 역사가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현대 인류와 아주 비슷한 동물은 약 250만 년 전 출현했지만, 수없이 많은 세대 동안 그들은 같은 지역에 서식하는 다른 수많은 동물들보다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다.

(p.20)

 

인류는 약 250만 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

(p.23)

 

일부 학자는 익혀 먹는 화식의 등장, 인간의 창자가 짧아진 것, 뇌가 커진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란 창자와 커다란 뇌를 함께 유지하기는 어렵다.

둘 다 에너지를 무척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화식은 창자를 짧게 만들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게 해주었고, 의도치 않은 이런 변화 덕분에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는 커다란 뇌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은 불을 길들임으로써 무한한 잠재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주요한 점은 불의 힘이 신체의 형태나 구조, 힘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었다.

(p.32~33)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p.41)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런 전례 없는 업적이 사피엔스의 인지능력에 혁명이 일어난 결과라고 믿는다.

인지 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을 말하다.

(p.43~44)

 

과학적 연구 결과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오늘날에도 인간으로 이뤄진 조직의 결정적 임계치는 이 마법의 숫자 근처 어딘가에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해서 이 결정적 임계치를 넘어 마침내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수억 명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아마도 허구의 등장에 있었을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공통의 신화를 믿으면 성공적 협력이 가능하다.

국가는 공통의 국가적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p.52~53)

 

'푸조' 회사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일까?

경영자가 모두 해고되고 주식이 모두 팔릴지라도 회사 자체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푸조는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변호사들은 이를 '법적인 허구'라 부른다.

(p.54~55)

 

거짓말과 달리 가상의 실재는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통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가상의 실재는 현실 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

 

 

​우리가 아는 한, 사회 패턴의 변화, 새로운 기술의 발명, 새로운 주거지에의 정착은 문화가 개시한 일이라기보다는 유전자 돌연변이와 환경의 압력에 따른 결과였다.

(p.59)

 

 

 

인지혁명 이후 생물학과 역사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은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과 능력의 기본 한계를 결정한다. 모든 역사는 이런 생물학적 영역의 구속 내에서 일어난다.

 

2. 하지만 이 영역은 극도로 넓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할 수 있다. 사피엔스는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점점 더 복잡한 게임을 만들었고, 이 게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진다.

 

3. 결과적으로, 사피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경로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가 생물학적 속박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면서 선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운동장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다를 바 없다.

 

(p.68)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역사 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p153)

 

 

 

신화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밀집된 도시와 강력한 제국이 형성될 가능성이 열리자, 사람들은 위대한 신들,

조상의 땅, 주식회사 등등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155p)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하지만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상상의 질서는 폭력으로 유지되나,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 일부 있어야 한다.

 

(p167)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인공지능 분야는 오로지 컴퓨터의 이진부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지능을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있다.

 

(p195)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페질서 였다.

지구적 비전을 실현한 첫 번째 정복자는 바로 돈이다.

 

(p247)

 

 

화폐란 상호신뢰 시스템의 일종이지만, 그저 그런 상호신뢰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것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신뢰 시스템이다.

이런 신뢰를 창조한 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관계의 매우 복잡하고 장기적인 네트워크다.

 

(p258)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p266)

 

 

 

오늘날 이집트인은 아랍어로 말하고,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생각하며, 아랍 제국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자신들에 대항하여 일어난 여러 차례의 반란을 철권으로 진압했던 제국을 말이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약 1천만 명의 줄루족은 19세기에 있었던 줄루족의 영광의 시대를 들먹이지만, 사실 그들 대부분은 줄루 제국에 대항해서 싸웠으며 유혈 군사작전을 통해서 강제로 제국에 편입된 종족들의 후예이다.

 

(p279)

 

사피엔스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두 부류로 나눈다.

우리란 너와 나, 언어와 종교와 관습이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p280~281)

 

일신교와 구별되는 다신교의 근본적 통찰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은 관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나 근심 걱정에 개의치 않는다.

이 권력에게 전쟁의 승리나 건강, 비를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위치에서 보면, 특정 왕국의 승리나 패배, 특정 도시의 번영이나 쇠퇴, 특정인의 회복이나 사망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p304)

 

 

 

고타마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개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

마음은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불이 완전히 꺼지면 집착은 완벽한 만족과 평온의 상태와 자리를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열반이다.

(열반은 문자 그대로 '불 끄기'란 뜻이다.)

(p320~321)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은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p329)

 

 

 

 

우리는 역사가 하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선택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할 수는 있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가 펼쳐짐에 따라 인류의 복지가 필연적으로 개선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류에게 이로운 문화가 반드시 성공하고 퍼진다든가 덜 이로운 문화는 사라진다든가 하는 증거도 없다.

(p343)

 

 

역사는 교차로에서 교차로로, 뭔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처음에는 이 경로를 택했다가 다음에는 저 경로로 진입했다가 하면서 나아간다.

역사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있는 드넓은 지평을 갖고 있으며, 그중 많은 가능성들은 영영 실현되지 않는다.

세대에서 세대를 거듭하면서 역사가 진행되지만 과학혁명을 비켜가는 흐름도 얼마든지 상상 가능하다.

기독교나 로마 제국, 금화가 없는 역사를 상상하는 게 이상할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p346~347)

 

 

 

1945년 7월 16일 미국 과학자들은 앨러머고도 사막에 첫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그 순간 이후 인류는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킬 능력뿐 아니라 역사를 끝장낼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앨러머고도로, 그리고 달로 이끈 역사적 과정이 과학혁명이다.

지난 5세기 동안, 인류는 과학 연구에 투자하면 스스로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점차 믿게 되었다.

증거가 쌓일수록, 부자와 정부는 과학에 더 많은 자원을 기꺼이 투입하였다.

왜 현대 인류는 자신에게 연구를 통해 새로운 힘을 획득할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p354~355)

 

 

현대 과학이 과거의 전통 지식과 다른 점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새 힘의 획득.

현대 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한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p356)

 

 

 

모두가 동의하는 바 만일 그 이론에 반대되는 새로운 증거가 등장한다면 해당 이론은 수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좋은 예가 지구 판구조론과 진화론이다.

현대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덕분에 기존의 어떤 전통지식보다 더 역동적이고 유연하며 탐구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능력과 새로운 기술을 발명할 역량이 크게 확대되었다.

(p359~360)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매우 중요한 몇 명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으므로,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 현대의 지배적인 연구기법은 오래된 지식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p364)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난, 질병, 노화, 죽음은 인류의 피치 못할 운명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무지가 낳은 결과였다.

(p375)

 

 

역사를 통틀어 사회를 고통스럽게 했던 가난은 두 종류였다.

남들은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나는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가난 그리고 식량과 집이 없어서 개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생물학적 가난이었다.

사회적 가난은 아마도 결코 근절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생물학적 가난은 옛말이 되었다.

(p377)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류의 모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늘 죽음의 문제였다.

죽음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선지자들은 죽음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바빴다.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오래된 고대 신화, 즉 고대 수메르의 길가 메시 신화가 다루는 주제도 이것이다.

신들은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필연적 숙명으로 정했으며 인간은 그 숙명과 함께 사는 법을 매워야 한다는 것을 길가 메시는 깨달았다.

진도의 사도들은 이런 패배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자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신이 그렇게 정해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심근경색이나 암, 감염 같은 다양한 기술적 실패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답이 있게 마련이다.​

(p378~379)

 

 

제한된 자원을 끌어오려면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좋은가?"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과학적 질문이 아니다.

과학은 세상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래에 무엇이 존재할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의상 과학은 미래에 무엇이 존재해야 마땅한지를 안다고 해서 허세를 부릴 수 없다.

그런 질문에 답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이데올로기뿐이다.

한마디로, 과학 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p387~389)

 

 

 

 

요즘 사람들은 당사자들이 통상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수준으로 유럽식 복장을 하고, 유럽식 사고방식과 취향을 지니고 있다.

말로는 반유럽 정서를 드러낼지도 모르지만,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은 유럽식 시각을 견지하며, 유럽식으로 작곡된 곡에 유럽 언어로 된 가사가 붙은 음악을 듣는다.

(p396)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p399)

 

 

 

유럽인들은 마치 자석처럼 지도에서 비어 있는 곳들로 이끌렸고 공백을 신속하게 채워 넣기 시작했다.

15~16세기 동안 유럽 탐험대는 아프리카를 일주하고, 아메리카를 답사했으며, 태평양과 인도양을 횡단하고, 세계 전역에 그물처럼 기지와 식민지를 건설했다.

장거리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인간 사회는 국지적 분쟁과 이웃과의 불화만으로도 너무 바빴다.

먼 곳의 땅을 탐사하고 정복한다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p.408)

 

 

 

 

정화 제독의 원정은 유럽이 뛰어난 기술적 우위를 누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유럽인들이 이례적인 점은 탐험과 정복의 야망이 어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이 탐욕스러웠다는 데 있었다.

로마인들은 설사 그럴 능력이 있었다고 해도 인도나 스칸디나비아의 정복을 꾀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인들도 마찬가지로 마다가스카르나 스페인 정복을 시도하지 않았다.

중국인들도 인도네시아나 아프리카를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의 지배자 대부분은 이웃 일본마저도 그들 뜻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다.

여기에는 별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근대 초기 유럽인들이 걸린 열병이었다.

그 열병은 그들로 하여금 낯선 문화가 가득한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항해하여, 그 해변에 한 발 디딘 뒤, 즉각 이렇게 선언하게끔 만들었다.

"이 땅은 모두 우리 왕의 것이다!"

(p.411)

 

 

비유럽 문화권들이 진정 세계적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는 유럽이 헤게모니를 잃게 된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만일 국지적 전투가 전 지구적 대의명분의 대상이 된다면 초강대국이라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 게릴라군은 보여주었다.

만일 몬테주마 2세가 스페인의 여론을 조작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스페인의 라이벌인 포르투갈이나 프랑스, 혹은 오트만 제국에게 지원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p.419)

 

 

 

 

인도에 부임하는 영국 장교들은 길게는 3년간 콜카타 대학에서 공부해야 했다.

여기서 영국법과 함께 힌두법과 무슬림법을, 그리스어 및 라틴어와 함께 산스크리트어, 우르드어, 페르시아어를, 수학, 경제학, 지리학과 함께 타밀, 벵골, 힌두스탄 문화를 배워야 했다.

언어학 공부는 현지어의 구조와 문법을 이해하는데 더할 수 없이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윌리엄 존스나 헨리 롤린슨 같은 사람들의 업적 덕분에 유럽 정복자들은 자신의 제국을 매우 잘 알았다.

그 이전의 어느 정복자보다도, 심지어 원주민들보다도 훨씬 더 깊이.

그런 지식이 없었다면, 우스울 정도로 적은 숫자였던 영국인이 수억 명의 인도인을 2세기에 걸쳐 지배, 억압, 착취하니는 못했을 것이다.

근대 유럽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언제나 선이라고 믿게 되었다.

제국에서 새로운 지식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덕분에, 제국에는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업이란 이미지가 붙었다.

게다가 제국에 의해 축적된 새로운 지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피지배 민족을 이롭게 하고 이들에게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p.424~425)

 

 

하지만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이 현재 인간 집단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는 미미하다고 말함으로써 인종주의를 간단히 기각할 수 있는 데 비해, 역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그렇게 쉽게 문화주의를 기각할 수 없다.

무엇보다 만일 인간문화 사이의 차이가 미미하다면, 우리가 왜 역사학자와 인류학자에게 그 미미한 차이를 연구하라고 자금을 지원해야 한단 말인가?

(p.429)

 

 

 

근대 경제사를 알기 위해서 정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성장'이란 단어다.

 

(p.431)

 

 

 

 

 

은행은 자신들이 가진 1달러당 10달러를 빌려주는 것이 허용된다.

그 말은 우리의 은행 계좌에 있는 모든 예금의 90퍼센트는 이에 대응하는 실제 화폐가 없다는 뜻이다.

만일 바클레이 은행의 예금주들이 모두가 갑자기 전액 인출을 요구한다면, 은행은 즉각 파산할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피라미드식 이자 사기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이것이 사기라면, 현대 경제 전체가 사기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놀라운 능력을 바치는 헌사다.

은행-그리고 경제 전채-을 살아남게 하고 꽃 피게 만드는 것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신뢰다.

오로지 이 신뢰가 세계의 돈 대부분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기업은 이처럼 상상된 미래에 대한 신뢰 위에 세워져 있다.

기업가와 은행가가 자신들이 꿈꾸는 빵집에 보내는 신뢰에, 그리고 은행의 미래 지불 능력에 대해 도급업자가 지니고 있는 신뢰에, 앞에서 보았듯이, 돈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대표할 수 있고 무엇이든 다른 거의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존재다.

 

(p.433~434)

 

 

 

 

만일 당신이 앞으로 어떤 회사가 큰 수익을 내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주식이 이미 모두 팔렸다고 하자.

당신은 그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에게서 일부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원래 구매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p.454)

 

 

 

 

오늘날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p.463)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p.472)

 

 

 

 

현대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신뢰하는 덕분이며, 자본주 의자들이 이윤을 생산에 재투자할 의사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에는 에너지와 원자재가 필요한데 이는 유한하다.

만일 이것들이 고갈되는 때가 온다면, 전체 시스템은 붕괴할 것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의 에너지와 원자재 사용량은 급격히 늘었지만 이용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의 양도 늘어났다.

둘 중 하나가 부족해서 경제성장이 느려질 위험이 생기면 그때마다 과학적, 기술적 연구에 투자가 흘러 들어갔다.

그러면 예외 없이 기존 자원을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에너지와 원자재가 만들어졌다.

(p473)

 

 

지구의 화석연료 전체에 저장된 에너지의 총량은 태양이 매일 공짜로 보내주는 에너지에 비하면 무시할 만한 정도다.

태양에너지 중 지구에 도달하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양은 매년 376만 6,800엑사줄에 이른다.

인간의 모든 활동과 산업에서 소비하는 양은 5백 엑사줄 가량으로,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90분간 받는 양에 불과하다.

(p480)

 

 

달걀과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짬을 내어 자기가 살이나 그 산물을 먹고 있는 닭과 암소, 돼지를 생각하는 일이 드물다.

(p486)

 

 

원숭이는 물질적 필요를 넘어서는 심리적 필요와 욕구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고, 만일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매우 큰 고통을 받는다.

할로의 새끼 원숭이들이 젖도 안 주는 천 엄마의 품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한 것은 이들이 젖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유대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결론은 원숭이뿐 아니라 여타 포유류와 조류에까지 적용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p489)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데 반해, 그만큼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자동차와 TV를 산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p493)

 

 

 

 

개인의 해방에는 대가가 따른다.

현대의 많은 사람이 강력한 가족과 공동체를 상실한 데 대해 슬퍼하며, 인간미가 없는 국가와 시장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 대문에 소외되고 위협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외된 개인으로 구성된 국가와 시장은 강력한 가족과 공동체로 구성된 국가와 시장에 비해 그 구성원들에게 훨씬 더 쉽게 개인할 수 있다.

고충 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수위에게 주어야 할 급여액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마당에 어떻게 이들이 국가에 저항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p509)

 

 

우리 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초의 시대다.

정치인, 사업가, 지식인, 예술가 등은 진심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악이라고 본다.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존재한다.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p528)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 세계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복도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치적 권리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경, 뉴런, 시냅스 그리고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 등의 다양한 생화학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p.544)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삶을 분 단위로 평가할 때, 중세 사람들의 삶은 고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이 죽음 뒤에 영원한 행복이 온다는 약속을 신봉했다면, 자신의 삶을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대의 불신자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완전하고도 가치 없는 망각 외에는 기대할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 전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이들은 주관적 행복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p.552)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던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p.558~559)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기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변형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사람들은 '인간적'이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p.584)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